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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습니다

기사승인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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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40년 전 광주 항쟁 선언문 대필
내란죄로 수배돼 수경사에 출두
뻔한 질문에 뻔한 답으로 모면
가슴에 남은 원죄, 이제야 고백

   
 

광주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세월이 많이 흘렀다.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은 모르고 육군 중령, 1980년 5월 당시 수경사 차장.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두웠다. 장맛비에 벼락이 쳐서 퇴계로 수경사 전역이 정전이었으니까. 6월 17일 밤 7시. 친구가 말해준 수경사 정문에 도착한 시각, 남산에 운집한 비구름 벼락에 사방이 깜깜했다. 두려웠다. 저 속에 들어가면 나올 수 있을까. 대학원생 출정식 선언문을 쓴 것이 화근이었다. 그걸 대필한 죄로 시국사범 A급으로 수배됐다. 그런데 수경사 부관이 우연히 나의 절친이었다. 계엄령이 발동한 5월 18일 밤, 절친이 공중전화로 알려줘서 알았다. 도망가라. 천운이었다.

나는 학생운동 근처에도 가지 않은 우유부단한 학생이었다. 단지 글발이 알려진 대학원생이었을 뿐,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의 리더 격인 김부겸, 김성식 같은 명장과는 급이 다른 보통 학생이었다.

5월 2일, ‘서울의 봄’을 맞아 학생들이 잔디밭에서 야영을 했다. 함성소리가 자주 들렸다. 후배가 찾아와 말했다. 내일 대학원생 출정식을 합니다, 선언문이 필요합니다. 나는 두말없이 승낙했다. 밤을 새워 썼다. 미국의 인권운동, 유럽 68 혁명, 남미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민주주의 필연성과 ‘서울의 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일필휘지 했다.

당시 국민소득 1천 7백 달러, 정치경제학적으로 민주주의는 멀고 먼 상황이었다. 새벽이 밝아왔다. 후배가 다시 왔다. 오늘 10시 출정식에서 낭독해 달라고. 밤을 지샌 탓에 목이 메여 거절했다. 그날 선언문을 낭독한 대학원생은 소식이 두절됐다. 30년 후, 수덕사 부근 암자 주지스님이 됐다는 후문을 들었을 뿐이다.

수경사 친구 권유를 따라 5월 18일 밤 종로 2가에서 인천 행 삼화고속버스를 탔다. 조교 선배 집이 제물포였다. 제물포에 내리자 경찰과 군인들 경계가 삼엄했다. 계엄령이 발동됐으니까. 옷가지를 챙겼던 가방 속에는 선언문 원본이 들어 있었다. 아무튼 역사문서라는 생각에서 갈무리했을 거다. 경찰과 군인들을 보자 겁이 덜컥 났다. 시장통으로 피신해서 원본을 찢어버렸다. 항구를 돌아다니면서 조교 선배와 열흘을 보냈다.

광주발(發) 피살뉴스가 텔레비전을 장식했다. 여고생이 칼에 찔려 사망한 소식이 타전됐다. 광주항쟁은 며칠 후 진압됐다. 수백 명이 희생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힘이 빠졌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집에 와도 좋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부관 친구가 손을 썼던 거다. 조건이 달렸다. 수경사에 출두해서 책임장교와 논쟁하는 것. 서울대 대학원생과 대적해 이기는 것이 그의 소원 중 하나였다. 벼락이 치던 6월 17일 밤, 수경사 정문에 출두했던 이유다.

공포에 질린 나를 구원한 것은 역시 절친이었다. ‘필승’ 견장을 단 친구가 대검을 착검한 복장으로 나왔다. 계엄령 상태였으니까. 들어가도 괜찮니? 친구가 끄덕였다. 장맛비가 쏟아졌다. 그를 따라 들어선 복도 양 옆엔 촛불이 도열했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복도 끝 방에 저승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은연중 부동자세를 취했다.

논쟁, 아니 심문이 시작됐다. 친구가 알려준 대로 질문은 세 가지였다. 장교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논쟁을 시작했다. 첫 질문, ‘광주사태에 북한 간첩이 대거 투입됐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고정간첩이 더러 끼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바뀌나? 머뭇거렸다. 친구가 눈치를 줬다. 정답은 ‘간첩소행이지요’다.

장교가 흡족한 표정으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빨갱이 김대중이 북한 첩자들과 내통해서 내란을 일으킨 거야, 어떻게 생각하나?’ 정답은 ‘맞습니다’다. 친구가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의기양양해진 그가 마지막 질문을 날렸다.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내란에 부화뇌동해서야 되겠는가?’ 정답은 ‘안됩니다’다. 세 개의 질문을 통과했다. 논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서울대 대학원생에게 내린 시혜는 ‘시국사범 A급 삭제’ 조치였다. 부화뇌동했던 선언문 대필자 대학원생은 그렇게 풀려났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얼핏 보아 당시 그 장교는 40대 초, 지금은 팔순을 약간 넘는 나이다. 광주항쟁 40주년, 그 대학원생은 정년퇴직을 앞둔 교수다. 부관 친구의 청탁을 들어줬던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당시의 신념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은 원죄(原罪)는 남아 있다.

비겁하지만 정답을 이제 말한다. ‘세 가지 답은 계엄사에서 조작한 시나리오, 수경사·정보사·계엄사가 다 그렇게 각색한 것 아닙니까.’ 당시 시국사범으로 수배된 대학생 360명은 강제 징집됐다. 광주에서 5천명 넘게 사상자가 났다. 광주 시민, 유족, 시민군의 40년은 한(恨)과 멍투성이다. 선언문을 낭독한 그는 아직 암자의 주지스님일까. 세월이 지난 지금, 솔직히 얘기하고 싶다. 광주 영령들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사람을 찾습니다. 그 육군 장교, 좀 늦긴 했지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영령들께 삼가 고합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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