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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피해 75주년 특집

기사승인 20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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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희 / 본지 도쿄통신원

박정희 정부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한일간의 밀약

   

▲  1945년 미국군에 의해 공개된 일본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당시 모습. [AP 연합뉴스] 

금년 8월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 공격을 가한지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인류사에서 처음 있었던 핵 폭격으로 일본인 뿐만이 아닌 미국인 포로들과 수많은 재일조선인이 희생되었다.

일본정부는 8월 6일과 9일 원폭 피해자를 위한 위령제를 대대적으로 개최한다. 지난 2016년은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하였으며 연설 중 조선인 희생자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국제사회를 향한 이 지역 피해자들의 호소는 이곳을 세계적 비핵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게 했다.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의 차이에 있어 조선인 원폭 구호 문제는 비교적 피해자 구호 중심으로 해결되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 문제가 처음 제기될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려 했는지 한일간의 외교문서를 분석해 보면 그 윤곽이 분명하게 들어나 있다.

1. 한국정부는 당초 조선인 원폭 피해자 문제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2. 피해자들이 주한일본대사관에서 데모를 하자 일본측의 요청으로 이 문제에 대한 당국간의 협의가 시작 되었다.
3. 양국은 이 문제가 이미 청구권 협상과정에서 해결이 끝난 문제임으로 어디까지나 한국 국내문제 혹은 일본의 인도적 지원문제라고 인식했다.
4. 피해자에 대한 지원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일본인들에 의해 논의 되었다.
5. 한국정부는 피해자 중심이 아닌 냉전의 관점에서 한미일 안보동맹에 더욱 중점을 두고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 같은 5가지 관점을 중심으로 원폭으로부터 75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양국의 당국자는 어디에 방점을 두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피폭자 수에 대하여 유일한 관련 단체인 “한국 원폭피해자 원호협회”의 배도환 대표이사는 신동원 외교부 동북아 과장과의 면담에서 원자폭탄 낙하 당시 히로시마에 있던 교포 수는 약 6만명이었으며 그들 중 4만여명이 사망하였고 잔여 2만명 중 약 8천명이 귀국, 84명은 귀화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원호협회는 67년 1월 27일 발족 이후 7월 10일 사단법인(보건사회부)으로 인가를 받았고 궁극적인 사업목표는 의료, 요양, 재활을 목적으로 하는 피폭자 센터 설치라고 하였다.

당초 이 협회는 67년 11월 4일 일부 환자들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한 것을 계기로 일본대사관 측과 접촉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대사관의 미타니 참사관이 한국 외교부를 방문하여 어디까지나 민간 베이스로 다루는것이 좋겠다고 언급하며 민간 구호 운동을 전개할 용의가 있다고 표명했던 것이 초기 한일 양국간의 협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한국 외교부는 “원폭 피해자 구호문제”(68.3.9작성)라는 문서에서 대일청구권 문제를 들며 피해자중 학병 내지 피징용자에 대해서는 대일보상 문제를 일단 고려 할 수 있으나 이는 청구권 협정으로 종결 지어졌으므로 법적으로 일본 정부에 제기할 여지는 없다고 파악된다며 그들에 대한 보상문제는 국내문제라고 언급하였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외교부는 8월 6일 한국인 희생자 4만여명을 위한 합동 위령제와 원폭 전시관을 개관하려 했으나 그 취지가 일본 좌익계의 행동과는 다른 자유진영의 핵무기 금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중공의 핵무기 발전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후 68년 4월 17일 신동원 동북아 과장과 미타니 일본대사관 참사관 간의 의견 교환을 보면 미타니 참사관은 본국 외무성으로 부터 “의료협력”이라면 고려할 수 있다는 비공식 통보를 받았다고 언급하며 의료협력의 의미는 원폭관계 전문의사가 한국에는 드물기때문에 한국의 전문의사 양성을 위한 기술 협력이라고 언급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으로는 6월에 히로시마대학의 시미조 박사가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그 경비는 일본 외무성의 ‘기밀비’에서 지출하도록 한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측의 제안에 대하여 한국측의 원자력원의 안00박사는 의료협력 계획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나 그에 따른 한국 내의 치료 문제와 함께 생활보호 문제까지도 거론 될 것이기에 국내 준비에 난점이 많은 점을 지적하며 이날의 담화는 마무리 되었다.

즉 당초 한국정부는 이 문제를 피해자 단체의 주한일본대사관 항의→일본대사관의 한국정부에 대한 협의 요청→청구권으로 이미 해결된 국내문제→피해자 중심의 문제 해결이 아닌 “반공과 국내실정”에 의한 정치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협상에는 미국의 기관 역시 등장한다. 원호협회는 미국의 ABCC(원폭피해조사위원회)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설치한 진료소로 협회의 설립 취지서 등을 보냈으나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 정부가 분석한 ABCC는 년간 일화 10억엔의 원조를 미국 정부로 부터 지원 받는 연구기관이며(의료구호기관 아님) 당초 일본측에 조사 자료를 비밀로 하여 일본 국회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일본측 예방위생연구소와 협력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우에노 히로시라는 사이타마현에 거주하는 도쿄 사진가 협회에 소속된 사진 기자는 68년 8월6일 일본의 원폭 관련 집회에 중상 피해자 2명 정도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전문의에게 치료 받을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본인이 중상 피해자의 도일을 위한 여비와 체재비, 치료비등을 지불하겠다고 하였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 또한 이 문제를 3월30일부터 5월 10일 까지 연재하며 이 기사에 무명 인사의 의연금이 1300엔 있었으며 오사카 로타리 클럽에서도 10000엔을 기부 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을 맞이한다. 바로 피폭 피해자 38세 여성 손귀달이 69년 9월 29일 새벽 밀항하여 10월 1일 20시에 일본에서 발각된 것이다. 그녀는 일본 출생이며 피폭 당시 히로시마 전신국 사택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손씨의 부친은 피폭 당시 히로시마 전신국 기사로 근무 중 사망하였으며 해방 이후 그녀는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밀항이 발각되었을 당시 그녀는 원폭증을 치료하기 위해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사촌 오빠를 찾아왔다고 밝혔다.

그녀와 관련하여 시모노세키 영사가 외교부장관에 보낸 보고서에서는 야마구치 소재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 건설 위원회”에서 손귀달의 치료를 위해 일본 일시 체류 허가를 교섭하고 있으나 이 단체는 극히 좌경 단체라고 불안감을 표시하며 담당 검사인 사토에게 손귀달 밀항 사건이 정치적 문제가 되지 않도록 신변인계 등의 경우 당 영사관과 사전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당 영사관은 손귀달에게 외부로부터 면회를 오더라도 함부로 면회에 응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재일민단 야마구치 지부에 대한 평가도 적혀있다. 동 지부의 민단은 사상적으로 불순하여 현재 민단에서 제명이 논의될 정도이므로 이 지역 민단 관계자들의 방문 역시 기대할 바가 못 된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당시 손귀달의 변호를 지원한 “일본원폭협의회”의 이노키 변호사와 오오보 변호사에 대한 평가로 이노키는 일본공산당 당원이며 오오보는 “일조(북일)협회” 회원이라는 점을 들어 담당 영사는 손귀달에게 이러한 변호사들의 의뢰를 취소하도록 권유하였다.

이후 일본 당국이 손귀달의 가석방을 결정하자 어떠한 경우에도 “일본원폭협의회” 또는 “조총련”계열 인사가 손귀달에게 접근 하지 못하도록 신변을 보호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주일한국공관은 손귀달의 변호사가 일본공산당의 당원인 이노키가 변호사였다던 점과, 당시 총련계로 보이는 20여명이 그녀를 위해 거리에서 모금행사를 버렸다는 점등을 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손귀달에 대한 보석금 7만엔은 시모노세키 영사관에서 지급했고 변호사 비용은 히로시마현의 민단 단장이 지불 했다. 석방 후에는 야마구치현 민단 부인회장이 그녀를 보호했다.

손귀달을 비롯한 조선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인식을 당시 외무부장관이 주일대사에게 보낸 전문을 살펴보자. 우선 국내 보건사회부에서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원폭 피해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으로 손귀달에 대한 정부기관의 보조가 있을 경우 국내의 다른 원폭 피해자들로 부터 부작용이 생길수 있고 밀항자가 증가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치료 비용에 대하여 손귀달의 친척인 손진춘이 1차적으로 부담 하여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가 제기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당분간 대외적 접촉을 보류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후 주일대사관 안경호 공사는 10월 16일 외무성 스노베 아세아 국장과 면담하여 일본측이 손귀달에 대한 치료를 무상으로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스노베 국장은 손귀달이 가석방 신분이기에 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언급하며 한국측이 진찰 비용만은 우선적으로 부담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과적으로 손귀달은 68년 11월 8일 원폭 증세가 경미하다는 판정을 받은 후에 본인의 즉시 귀국 희망에 따라 한국에 귀국하게 된다.

손귀달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주요 언론은 조선인 피폭자에 대한 보도를 지속적으로 하여 일본인들에게 잊혀졌던 조선인 피폭자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의 자민당 및 민사당의 후원을 받고 있는 “핵병기금지 평화건설 국민회의 (핵금회의)”는 강영규 주일공사에게 100만엔의 조선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기부 의사를 타진하였다. 한국 외교부가 분석한 핵금회의는 사회당이 추진하고 있는 원수협, 공산당이 추진하고 있는 원수금에 대항하여 출발한 반공적 색체를 지닌 조직이라고 호의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핵금회의가 모든 핵무기의 폐기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본국의 당면 국방정책상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정부가 회의의 취지에 적극 호응할 수 없기에 민간 단체인 “한국원폭 피해자 원호협회”와 접촉시키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일본의 핵금회의의 기부금을 받아 48명의 진료비 30만엔, 원폭 피해자 수용센터 설립기금 70만엔의 사용계획을 세웠다.

또한 히로시마 소재 “피폭자 구제 한일협의회”에서는 한국내의 피폭자 치료를 위해 의사 4인(외과 2, 내과 2)과 동행인 2인 등 총 6인을 파견하여 한국 의료진에 대한 지원을 펼치게 된다.

이렇듯 조선인 피폭자 문제를 둘러싼 박정희 정부의 한일 당국 간의 협의내용과 그 결과 그리고 일본 민간단체의 조선인 피폭자 지원에 대한 경위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피해자 우선”이 아닌 “냉전적 사고에서의 정치문제”로서 이 문제를 다루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한국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이미 끝난 문제로 인식 하고 있다는 점은 현재 당면한 여러 과제에 있어 큰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 당시 보건사회부는 예산 부족과 의료 능력 부족을 이유로 피폭자 문제를 해결할 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이다.

이후 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은 치료와 보상을 함께 받게 되었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일본 언론과 시민단체의 도움이 없이 박정희 정부하의 양국의 밀약으로만 이 문제가 종결되었다면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은 해방 후 돌아온 조국에서 어떠한 여생을 보냈을까? 라는 물음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강희 도쿄 통신원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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