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 논설실장
레바논의 비극을 보며 다시 묻게 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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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홉스가 말했다. 지옥은 너무 늦게 본 진실이다. 레바논의 비극을 보면서 떠오른 말이다. 알파벳을 만든 찬란한 페니키아 문명의 발원지였고 중동의 스위스로 불리며 번영했던 이 땅은 왜 아비규환이 됐을까.
레바논의 국가는 실패했다. 대폭발의 전조는 뚜렷했다. 베이루트 항구에 엄청난 폭발물이 쌓일 때 거리에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쌓였다. 5년 전 여름 주요 쓰레기 매립지가 대안도 없이 폐쇄됐을 때였다. 푹푹 찌는 날의 쓰레기 더미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정부는 즉각 행동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평소 아무 일도 하지 않던 레바논 정부가 제때 나설 리 없었다. 역시 아무 일도 하지 않던 의회는 급할 게 없었다. 참다 못한 시민들은 `유 스팅크(You Stink·당신들에게 악취가 나)`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분열된 사회는 국가를 바꿀 수 없었다. 중동의 파리라던 베이루트의 쓰레기 대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런 나라에서 2750t의 폭발성 물질이 6년 동안 방치돼 있었다. 분노와 절망을 주체할 길 없는 국민 중에는 과거 식민 통치자였던 프랑스에 `우리를 맡아 달라`고 청원하는 이들도 있다.
폭발 참사 전에도 레바논 경제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지난 3월 정부는 사상 첫 디폴트(채무 상환 불능)를 냈다. 달러에 연동된 통화는 암시장에서 80%나 폭락했다. 쇠고기 1㎏을 사려면 한 달 최저임금의 15%를 내야 했다. 병사들에게도 육류 공급이 중단됐다. 국민 4명 중 3명은 도움 없이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의료 체계는 코로나19 습격에다 폭발 사고의 충격이 겹쳐 붕괴 상태다. 무슨 수를 쓰든 이 나라를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레바논의 참을 수 없는 비극을 지켜본 이들은 누구나 다시 묻게 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레바논은 현대 국가다. 하지만 너무나 허약한 국가다. 이 나라는 애초에 독립 전인 1932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를 기초로 각 집단 간 권력을 배분하는 협약을 맺었다. 대통령과 총리, 부총리, 국회의장, 부의장, 군 참모총장은 언제나 어느 특정 종파의 몫이었다. 이 나라는 그 후 인구 총조사를 하지 않았다. 국가는 국민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은 국가에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1975년부터 15년 동안 내전을 거친 후 약간의 조정이 있었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 각 종파 간 권력 분점의 큰 틀은 유지됐다. 이 체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력한 국가를 낳았다. 이 체제에서는 모든 집단이 다른 집단에 거부권을 갖는다. 끔찍한 교착 상태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각 집단은 정부와 의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다른 적대적인 집단에 권력이 포획되는 것을 더 싫어했다.
`블랙스완`을 쓴 나심 탈레브는 레바논에서 태어난 투자가다. 그는 내전이 벌어진 10대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몇 발의 총알과 박격포탄으로 레바논의 천국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13세기 가까이 이어진 민족 간 공존이 끝나고 느닷없이 블랙스완이 나타나면서 이곳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레바논의 참사는 `블랙스완`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고 막을 수 있는 비극이었다. 쓰레기가 쌓일 때는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다. 폭발물이 쌓여 있을 때도 여러 차례 경고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국가와 사회는 파국을 막지 못했다. 정부와 의회는 일을 하지 않았다. 사회는 그들이 일을 하게 하지 않았다. 일을 한다는 것은 곧 문제를 푸는 것이다. 치명적인 문제는 그냥 쌓여 있었다. 누구도 쓰레기를 제때 치우지 못했다. 언젠가 터질 폭발물을 내버려 뒀다. 국가의 실패를 걱정하는 모든 나라에 반면교사가 될 레바논은 처절하게 웅변한다. 너무 늦게 본 진실은 지옥이다.
매일경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