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자발적 복종(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

기사승인 2021.03.01  

공유
default_news_ad1

[서천 / MA서부한인회장]

자유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자유를 모른다. 자유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모르는 게 당연하다. 사람들의 내면에 자유에 대한 열망보다 노예화를 갈구하는 열망이 가득 차 있는 일도 있다. 자유를 포기하고, 순응하는 노예화 습관과 교육이 원인이기도 하다. _라 보에티(Étienne de La Boétie)

   
 

지성을 가르치는 전당의 교수가 어찌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지 못하고 인류사의 가장 추악하고 참혹한 진실을 왜곡 하려 하는가? 하버드의 위상이 안타깝다. 법은 개인의 견해에 대한 해석 개념이 아니다. 법은 자율(autonomy)개념이 없다. 사회적 규범을 역사와 사회에 맞게 만들어 놓은 것이 법 아닌가?  법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가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조차 모호하게 사용하면 진실은 정의가 아니라 힘이나 돈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또 로렌스 바카우 총장은 말하길 학문의 자유는 '논쟁적인 견해를 표현하는 것을 포함한다'라고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나치를 두둔하거나 정의롭다고 말한 독일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속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는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표현이 있다. 하버드의 지성은 자작나무 껍질처럼 저 스스로 벗고 있는 것인가. 총장의 비상식적인 생각으로 하여 하버드의 위상은 추락하고 지성은 기준점이 모호해졌다. 이는 명명백백을 근간으로 하는 식자가 나아갈 바른 방향이 아니다. 이 문제를 꺼낸 이유가 단순하지 않다고 본다. 문제가 된 곳이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 말하는 하버드대학의 법대 교수이다. 미래를 내다본 한일관계 국제법의 포석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한국민이 분연히 일어서서 이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의 일에 제3자가 끼어서 C는 B의 자율을 존중한다고 해버리면 강압과 자율의 의미가 모호해진다. 이 경우가 아니라면 마크 램지어는 자발적 복종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는 것인가?

나치로부터 참혹한 피해를 본 당사국들에 독일은 절절한 반성을 통절하게 영구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 인식은 저들의 우월성을 찬양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자랑스러워하는 해괴한 짓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을 침탈(侵奪)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자행한 패악질은 이루 다 언표하기 어렵다. 당한 자가 역사를 잊어버리면 참으로 슬픈 국민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죄는 커녕 저들이 병탄(倂呑)하고 능욕한 한국과 중국에는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표시하며 아시아 여러 나라를 열등한 인종으로 폄하하고 비열한 존재로 멸시하고 있다. 여기에 동조하는 자발적 복종자들 친일 세력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국가가 제대로 역사 인식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나는 한민족의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정의로운 결기를 믿는다. 국기(國基)한 이래 외세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했어도 우리는 당당하게 우리의 문화를 지켜낸 장엄하고 위대한 한민족이다. 잠시 분노하고 지날 일이 절대 아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에게 짐이 되기보다 등 기대어 의지하고 단합하여 함께가자.

   
 
   
 

서천

<저작권자 © 세계한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