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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김길남(金吉男) 회장, 그는 누구인가

기사승인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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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홍 / 본지 발행인]

   
 

산수(傘壽)의 나이가 된 김길남씨가 최근 『출렁이는 강물처럼』이란 자서전을 냈다.

그는 자서전 앞자락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격동의 시대를 건너온 내 삶의 기록이 후세에게 아픈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하는 기대를 한다”라고 적었고 이어 “사실 솔직한 심정은 얼마 후 사라질 모래밭에 발자국이라도 남겨 보자는 내 욕심 때문에 다 늙어 자서전을 내게 됐다‘고 술회한다.

필자가 김 회장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가 시카고 한인회장으로 재임하던 지난 1994년 경이었다. 첫인상이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형으로 기억된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항상 미소 짓는 모습으로 대해주어 상대하기가 편안했다.

필자는 당시 김 회장에게 여러 자질구레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기억된다. 그 중에서도 한인회장으로서 본국 정부에 요망사항이 있다면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현재 본국에서는 해외교포들에 대한 이중국적문제, 교민청 신설문제, 체류기간 연장 문제, 본국의 교포재산권문제등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그런 문제는 제가 총연 회장 재임시 수차례 걸쳐 정부요로에 건의해왔던 것입니다.”

“북한을 포함하여 본국의 南과 北의 교민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교포들은 항상 본국정부 관리, 공작, 체제선전의 대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교포들도 자성할 바가 많습니다.”

재미한인사회의 지도층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본국 정부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 회장은 교포사회 자체의 자성을 촉구하는 말을 많이 해서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김 회장은 “지난 1992년 LA폭동은 흑인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들이 집단 구타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면서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재미한인사회가 뒤집어썼다면서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당시 미국의 사법 당국과 지역 언론들은 무자비한 경찰과 빈부 격차, 인종차별 등 미국 사회에 잠복한 근본문제 보다는 한·흑 갈등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한인들이 입은 정서적 상처는 물론 물질적 피해도 엄청났다”고 말했다.

4월 29일에 시작해 5월 3일에야 진정국면에 들어선 흑인폭동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5천여 명에 이르렀고 재산피해액만도 7억 5천만 달러에 달했는데 그 피해의 대부분이 한국이민자들이 고스란히, 어디에 호소할 길 없이 눈뜨고 당하기만 했다.

폭동이 진행되는 동안 부유한 백인 거주지역에는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한 반면, 정작 흑인가의 옆에 있는 한인타운에서는 경찰들이 초기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았다.

김 회장은 이 때를 회상하면서 당시 한국의 국력이 일본 만큼만 되었어도 LA시에 한인 시의원 2~3명만 있었어도 눈앞에서 한인상가들이 불타고 약탈당하고 살해당해도 그 누구에게 호소할 길이 없었던 것이 당시 LA 폭동의 진상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와 같은 재미동포사회의 비애를 몸소 격고난 후 김 회장은 이민관, 본국에 대한 시각, 교민 사회의 제 문제에 새로운 자각을 갖게 됐다고 술회한다.

김 회장은 시카고 한인회장을 마치고 ‘미주한인총연합회’에 발을 들여 놓는다. 당시 재미동포 수요는 어림잡아 200만. 우선 재미동포들이 단결하여 그 여세를 몰아 전 세계 한인사회로 눈을 돌리는 작업이었다. 그동안 우리 조국은 한국(남한)이라는 시각에서 북녘의 땅과 동포들도 우리의 조국이라는 발상 전환을 하기에 이르렀다.

UN에 진출한 북한 대표부 인사들과 접촉했고 때로는 우리 집에 초대하여 허심탄회한 대화도 나누었다.
북한의 ‘해외동포위원회’의 전경남 부위원장과도 교류를 했다.

한국에서는 북의 ‘해외동포위원회’를 본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가 발족되었는데 그전까지는 교포사회 스스로가 자각하여 결성된 ‘한민족대표자회의’가 워싱턴, 도쿄, 중국 등지를 오가면서 해외 한민족의 미래상, 조국 통일을 위한 해외동포의 역할 등을 주제로 열띤 토론과 화합의 장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이 회합의 특징은 교포사회의 자율성 보장, 남과북 양 정부의 교포사회 요망사항 전달, 조국 남과 북의 자유왕래 보장 등 자율권이 보장된 교류 협력이 18차에 걸쳐 이루어 졌는데 그 이후 이 단체의 모임은 소리 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왜일까.

남과 북 양 정권의 교민정책의 청사진 부재로 밖에 볼 수 없어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 후 한국정부는 교포사회의 영주권 소지자들에게 참정권이라는 특혜 아닌 특혜를 베풀었는데 이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아무튼 오늘날 전 세계에 700만이라는 동포를 포용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세계수위권에 속한다. 특히 분단 국가에서 해외동포 700만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저력이요, 민족자산이다.

   
 

금번 미국의 상하 양원, 지방의회 선거에서 4명의 국회의원, 12명의 지방의원을 배출한 것은 한민족의 우수성을 미국사회에 유감없이 발휘한 쾌거 중 쾌거로내외동포가 함께 경하할 일이다.

“끝으로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어왔던 선배 한사람으로서 장차 한인사회를 이끌어갈 후배들에게 간곡히 남기고 싶은 말이 있사오니 흘려듣지 말기를 당부 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재미한인독립운동사’에 대한 정사(正史)문제입니다. 나는 시카고한인회장때부터 미주한인 1세대들의 독립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난 1909년 2월 하와이에서 발족된 ‘국민회’와 이를 이끌어 오신 박용만 선생의 장엄한 독립운동사를 자료와 함께 선생이 활동하시던 미주 전역의 활동무대를 나름대로 답사하기도 하고 그 시절을 증언해 주실 인사들과도 면담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복된 조국에도, 미주한인사회에도 ‘국민회’와 박용만 선생의 독립투쟁사가 온전히 기록돼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만난 증언자들은 한결같이 미국에서 탄생한 ‘국민회’와 박용만 선생의 업적은 상해 임시정부를 이끈 김구 선생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에 찬연히 기록되어야 할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아무리 독립운동의 노선이 달랐다 해도 ‘국민회’의 절대적인 지원 하에 활동을 전개해 왔던 이승만 박사가 ‘국민회’를 떠나 ‘동지회’를 설립하고 그 후 광복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국민회’와 박용만 선생의 발자취가 왜곡되거나 축소되었다면 어찌 ‘재미한인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재미한인 이민사도 1세기를 훨씬 넘겼고 본국 동포들과 더불어 조국 통일의 동반자로 성숙한 지금, 재미한인 독립운동의 정사를 새롭게 쓰는데 후배들의 세심한 관심을 가져 주십사 당부 드립니다.”

 

이구홍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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