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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바나 쇼이치와 ‘일장기’

기사승인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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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 | 동아시아평화연구소장·우석대 석좌교수]

   
 

일본 오키나와의 반전평화운동가 지바나 쇼이치(知花昌一)가 지난 5월 말 울산지역 역사교사들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3년 전 오키나와 요미탄촌을 찾아가 그와 그의 맹우인 긴조 미노루(金城) 조각가를 만나 받았던 감동을 학생들에게도 전하려고 교사들이 ‘사제동행 특강’을 마련한 것이다. 구김살 없는 지바나의 진솔한 마음, 부조리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살아온 오키나와의 소박한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이 학생들의 마음에 꽂혔다.

지바나 쇼이치는 1987년 오키나와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전국체전에서 소프트볼 경기장의 히노마루(일장기)를 끌어내려 불을 붙인 사건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노마 필드가 쓴 <천황이 죽어가는 나라에서>(창비·2014년)에서도 다뤄졌다. 기물손괴라는 경범죄에 해당되는 행위가 당시 ‘천황’을 모독하여 나라에 반역하는 대역(大逆)사건이 되었다. 격앙한 우익들은 지바나를 “국적” “매국노”라고 매도하며 그가 경영하던 마을 슈퍼마켓에 불을 질러 냉장고도 파괴해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군정하에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금지되었다. 1952년 미군정의 종식과 ‘주권회복’ 후에도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사람들의 경계와 자제가 작동한 시기를 거쳤다. 1960년대, 내 청춘시대에는 일본 국민에게 국기·국가의 강요는 없었고 국민들도 히노마루, 기미가요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젊은이들은 이것을 촌스럽고, 억압적이라며 혐오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일본이 헌법 9조와 ‘전수방위(專守防衛·모든 군사력을 자국 영토 방위에만 할당)’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되고,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전투의 합법화가 진행되던 즈음인 1999년 히노마루와 천황의 치세를 가사로 담은 기미가요를 국기·국가로 하는 법이 성립했다. 이후 음습한 행정벌로 압박하여 학교나 행정관청에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강요했다. 그래서 1987년 당시에는 지바나를 ‘거룩한 천황의 나라’에 대한 모독이나 ‘역적’으로 몰지 못하고 기껏 ‘건조물 침입’ ‘기물손괴’ ‘위력업무방해’로 기소하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언도한 것이다. 차라리 국기·국가에 대한 모독을 엄벌하는 법이 있었더라면 지바나는 무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까닭은 미국에서는 1940년대부터 국기에 대한 존중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더 우월한 가치로 인정하고 국기를 불사르는 등의 모독을 무죄로 하는 판례가 이어졌으며, 일본에서도 1990년에 “자국 국기 손괴 금지는 위헌”이라는 최고재판소의 판단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지바나의 히노마루 소각사건의 엄청난 파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와 일본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인구의 4분의 1이 죽는 지옥을 겪고 27년간 미군정 지배를 받은 오키나와는 1609년, 일본의 가고시마(사쓰마) 지방 영주이던 시마즈의 무사가 류큐왕국을 침공한 뒤 260년 동안 가혹한 수탈을 당하고, 메이지가 되자 일본 중앙정부에 병합되었다. 결국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지체하게 하기 위한 사석(死石·바둑에서 죽은 돌)으로 불필요한 살육을 강요당했음에도 미군정하에서 차별과 군사기지로의 강요를 받아, 오키나와에서는 ‘본토복귀’(일본 통치로 돌아감)의 열망이 타올랐다. 복귀론은 다분히 미군의 억압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즉 교원노조 등 진보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오키나와의 복귀 시위나 집회에서는 히노마루를 들고 “헌법 9조, 평화주의의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구호를 외쳤는데, 그 무렵 일본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에 충실한 후방기지로서 미·일 안보조약에 묶인 미국의 ‘속국’이었다. 게다가 미·일 오키나와 반환협상에서는 미군 주둔 지속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핵무기의 존치를 인정하는 밀약까지 체결했다. 이 결과 미국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저항 속에서 점령통치해야 할 수고를 덜었으며, 일본은 영토회복이라는 야욕을 채워 한층 국가주의적 자존심을 세웠다. 나중에 노벨위원회가 “역사상 최대의 실수”라고 자탄하지만, A급 전범 기시의 친동생 사토 총리를 오키나와 반환을 실현한 ‘평화주의자’로 칭송하여, 노벨 평화상 수여라는 엉뚱한 덤까지 얹어주었다.

미군에 더하여, 자위대까지 주둔하게 되어, 혹을 떼려다 붙이는 우스운 꼴이 되었다. 지바나는 강연할 때 땟국물에 전 히노마루를 꺼내들었다. 지바나가 오키나와대학 학생자치회장 때부터 본토복귀를 외치고 흔들었던 깃발이라는 것이다. 그 깃발에 배반당한 그는 히노마루를 태우게 되는데, 그에게 히노마루가 하나 더 있다. 1945년 4월1일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해안을 제압하여 마을 코앞에 상륙했다. 마을 사람들은 지비치리가마(자연동굴)에 피신했는데, 상륙한 미군이 투항을 권고하자, 중국전선에서 종군 간호원이던 여자가 “미군에 잡히면 험한 꼴을 당하니 자결하자”고 선동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이고, 엄마가 아기를 죽이는 참극 속에서 139명 중 82명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것 또한 천황에게 충성하고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하느니 깨끗이 자결하라”는 군국주의 교육의 희생물인 것이다. 아베 일본은 그 위험한 군국주의의 상징을 또다시 높이 들려 하고 있다.

서승

<저작권자 © 세계한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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